1987년 7월경.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일방적으로 매맞은 날이다.
나는 9월에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전역 후 복학할 때, 등록금이라도
벌어보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에 종로구청에서 하는
보도블록 교체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기존에 깔려 있던 보도블록을
곡괭이로 깨서 트럭에 싣는 거였다.
힘들었지만 다른 아르바이트 보다
돈벌이가 꽤 좋았다.
종로 3가에 있는 공사업체 사무실로
6시 30분까지 출근했다.
그곳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장으로 갈 준비를 했다.
공사업체에서 준 곡괭이를 하나 들고서
함께 일할 3명과 트럭 뒤에 탔다.
종로 3가 공사 현장에 도착하면,
기존에 깔려있던 보도블록을
뜯어내고 트럭에 실었다.
일을 마치면 매일 지급되는
일당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난,
7월 중순 한여름이었다.
보도블록의 열기와 옆 아스팔트의 열기로
실제로 느끼는 더위는 10도 이상
덥게 느껴졌다.
뜨거운 때약 볕 아래서
오전 반나절을 일했는데도
땀을 많이 흘려서 체력이 바닥났다.
점심으로 얼음이 든 시원한
냉 콩국수를 곱빼기로 먹었다.
오후 1시.
뜨거운 때약 볕 아래 작업 현장으로 갔다.
작업이 시작되자 오후의 날씨는
오전보다 훨씬 더 더웠다.
덥다기 보다는 한증막에 있는 것처럼
습하고 뜨거웠다.
내 손에 쥔 곡괭이의 무게가
2~3배로 느껴졌다.
오후 3시경.
뜨거운 태양을 피해 가로수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20미터쯤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정차하고 한 여인이 내렸다.
먼 거리였지만 하늘하늘 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주위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내가 작업하고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데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전형적인 A형의 성격이다.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미팅을 나가도 말 한마디 못할 정도였다.
상대가 마음에 들어도
애프터 신청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런 내가 용기를 내서 그것도
길거리에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 저기요~~"
그녀를 불렀다. 마음 속으로.
그러나 현실은 내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내 앞을 지나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이렇게 그냥 보내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100미터쯤 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놓칠까 봐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쫓아갔다.
그렇게 계속 그녀를 뒤쫒아 가면서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그녀는 내가 쫓아오는 것을 느꼈는지
걸어가다가 힐끔 뒤돌아서 나를 보았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본 듯한 매우 놀란 그녀의 표정을.
나는 그녀가 대낮에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놀랐는지 몰랐다.
잠시 후,
옆 가게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녀가 그토록 놀란 이유를.
내 어깨에는 작업 현장에서 쓰던
큰 곡괭이가 내 어깨에 걸쳐 있었다.
땀투성이에 얼굴은 흙이 묻어있고
옷은 거지 같은 꼴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끌려서
내가 곡괭이를 든 것도 모르고
뒤쫓아 갖던 것이다.
이런 내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의 오해를 풀고
말 한마디라도 건네보고 싶었다.
그녀는 놀라서 빠른 걸음으로 도망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더 빨리 걸어갔다.
모퉁이에 있는 단독주택 앞에 멈춰 선
그녀는 문을 두드리면서 크게 소리쳤다.
"오빠~~, 오빠~~ 빨리 나와봐.
여기 이상한 사람이 나를 쫓아오고 있어"
나는 놀라서 멈칫했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때 집에서 그녀의 오빠가 나와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의 오빠에게 상황 설명을 하려는 순간,
그 남자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라왔다.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의 오빠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오해는 풀었지만 동생에게
추근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오빠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누가 봐도 없어 보이는
누추한 행색을 가진 나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작업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현장에서는 작업 팀장이
도대체 어디 갔다 왔냐고 짜증을 냈다.
"어라. 얼굴은 왜 그래?
오른쪽 눈이 많이 부었네"
"아~ 네. 좀 전에 넘어질 때 부딪쳤어요"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그래. 그럼 남은 작업 빨리 끝내자."
그날은 종로 3가 마지막 작업 날이었다.
다음날부터는 종로 5가
보도블록 교체 작업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녀의 모습의 볼 수는 없었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이미 나를 극도로 혐오하는
추행범 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에.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가 무모하고 귀엽고 순진하다.
언젠가 내 심장을 멎게 할
그런 여성이 또 다시 나타난다면
이번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해봐야지.
멋있게, 점잖게, 있어 보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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