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내 나이 20살.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군대에 입대를 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루한 나날을 보냈다.
"여보~ 작은 애 군에 갔다 오면,
학비가 걱정이에요.
지금부터 생활비 더 줄여서
적금을 부어야 겠어요"
우연히 엄마와 아빠가 하는
대화를 들었다.
"그래 군대 가기 전에
2학년 등록금을 벌어놓고 가자"
나는 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알바 구하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신문이나
대학 학과 게시판을 통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고소득 보장, 단기 알바, 월 100만 원"
학과 사무실 앞에 걸린
알바 모집 광고를 보았다.
바로 공중전화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알바 광고 보고 전화드렸어요.
지금도 구하나요?"
"네. 구해요.
바로 시작할 수 있으니 한번 오세요"
"그런데 하는 일이 뭔가요?"
"수세미 파는 건데,
초보자도 쉽게 팔수 있어요.
방법은 저희가 알려드려요"
전화기 건너편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중년의 남자 목소리였다.
나는 바로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에 있는 사무실로 갔다.
똑. 똑. 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은 꽤 넓었다.
사무실 공간의 거의 절반 이상이
수세미로 꽉 차 있었다.
"여기 수세미를
4개씩 포장해서 팔면 돼요"
"이걸 어떻게 팔죠?"
그분이 알려준 파는 방법은 이랬다.
우선 수세미를 비닐포장에 4개를 넣는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
내가 직접 쓴 손글씨로 내용을 적어서
수세미 포장할 때 함께 넣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순수하고 인정이 많아서,
이런 방법으로 파는 것이 제법 먹혔다.
손글씨로 200장을
3시간 정도를 앉아서 썼다.
다 쓰고 나니 손목과 팔이 얼얼했다.
"어느 지역을 갈까?"
생각에 잠겼다.
당시에 나는 은평구에 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평창동'이라고 곳이 있다.
당시에 이곳은 꽤 부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평창동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9시에 수세미를 담은
비닐포대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섰다.
200개가 넘는 수세미를 담은
비닐 포대는 내 몸 보다 더 컸다.
그걸 매고 평창동 주택가의
가파른 경사 길을 걸어 다녔다.
집집마다 수세미를 하나씩
집 담장 너머로 던졌다
당시에 평창동은 빌라, 아파트는 없었고,
대부분 큰 단독주택지였다.
수세미를 던진 집 앞에는
분필로 'V' 표시를 해두었다.
다음날은 전날 던져둔 수세미를
회수 및 팔러 가야 한다.
"띵동~~"
"누구세요?"
"네 어제 수세미 넣고 간 학생입니다"
"아~ 근데요?"
"하나 구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집 하나하나 돌면서 다녔다.
돌아다니다 보면 별의별 일이 생긴다.
벨을 눌렀으나, 아무도 없는 집.
왜 허락도 없이 넣었냐고 짜증 내는 집.
수세미가 많아서 다음에 사주겠다는 집.
마당에 강아지가 수세미를 쓰레기로 만든 집.
이렇게 100여 군데를 돌다 보니
오후 1시가 넘었다.
100군데 중에서 10집 정도가
수세미를 사주셨다.
하나 팔면 당시에
수수료가 오백 원이었다.
10개 팔았으니 오천 원이다.
오후에도 10개를 팔면
하루 벌이가 1만 원이다.
아니다.
전날은 수세미를 집집마다 돌려야 하니,
이틀에 1만 원을 벌수 있다.
100만 원 버는 게 목표였다.
군대 다녀와서 입학금을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면
200일을 해야 100만 원이다.
200일이면 거의 7개월이다.
더 열심히 해서 3개월에
100만 원을 버는 걸 목표로 했다.
다음날. 주택가에 수세미를 돌렸다.
배가 고팠다.
조용한 주택가 길모퉁이의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가져온 빵과 우유로 배고픔을 해결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때까지 내가 번 돈은 15만 원 정도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못 미쳤다.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아침에 바람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유난히 바람도 많이 불고 추웠다.
오늘은 전날 수세미를 돌린 집을
회수하러 다니는 날이었다.
나갈까 말까 수십 번을 고민하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어제 수세미를 돌린 평창동에 왔다.
오전 내내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다.
2월 말. 오전 날씨가 꽤 쌀쌀했다.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다녔다.
오후 5시쯤 되었다.
9개를 팔아서 4500원을 벌었다.
계획은 하루에 20개 파는 거였다.
절반도 못 팔았다.
이제 5집 정도 남았다.
대문이 매우 큰 집 앞에 섰다.
앞마당이 초등학교 때 운동장 만했다.
꽤 부자가 사는 집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피곤하고 춥고 배도 고팠다.
그 집 대문 한쪽 구석에 앉아
점심때 먹다 남은 옥수수를 먹었다.
그때 '덜컹~'하고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슈~~~"
"네 안녕하세요.
어제 수세미 놔두고 간 학생입니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셔서,
초인종을 소리를 들은 후 나오신 거였다.
"수세미라고~?"
"네. 어제 수세미 마당에 두고 갔는데 못 보셨어요?"
"아~ 수세미, 그거 학생이 넣고 간 거야?"
"네. 할머니, 학비가 없어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좀 사주세요"
"기특하네. 열심히 사네~
잠깐 기다려봐 들어가서 돈 가져올게.
근데 얼마지?"
"네 천오백 원입니다"
할머니는 돈을 가지러 다시 들어가셨다.
5분쯤 기다렸을까. 할머니께서 오셨다.
"지금 몇 살이야?"
"네 20살이에요"
"내 손자하고 나이가 같네"
할머니는 나에게 봉투를 주셨다.
"할머니 이 봉투는 뭐예요?"
"수세미 값이야"
나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나는 놀랬다.
만 원짜리가 두툼하게 들어있었다.
"할머니 1500원만 주시면 돼요"
"학생 학비에 보태 써.
대신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께서는 그렇게 들어가셨다.
나는 봉투를 열어서 돈을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스물다섯.
25장. 이십오만 원이었다.
당시 등록금이 50만 원 정도였다.
큰 돈이었다.
눈물이 났다.
사실, 그동안 수세미 잘 안 팔려서
포기할까 생각 중이었다.
"그래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하자."
2월 말 초저녁.
평창동 주택가 언덕의 날씨는
매우 쌀쌀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으로
내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평창동 주택가 내리막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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