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좋은 소식에, 왜 내 마음이 작아졌을까
“참 잘됐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날이 있다.
친구가 잘되었다는데
분명 기쁜 일인데,
내 방이 조금 좁아진 것 같다.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는 이야기.
자식이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
이제는 여행이나 다니며 살겠다는 이야기.
축하하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뒤늦게 밀려온 쓸쓸함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고는 그 마음마저 나무란다.
이 나이에 아직도 남을 부러워하느냐고.
마음 하나 넉넉하지 못하냐고.

어릴 적에는 성적표가 있었다.
몇 등인지 적혀 있어서
내가 어디쯤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가끔 보이지 않는 성적표를 꺼낸다.
집 평수 옆에 점수를 매기고,
자식의 직장 옆에 점수를 매기고,
통장 잔고 아래에 줄을 긋는다.
그 종이에는 이상하게도
오래 앓던 가족 곁을 지킨 시간은 없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걱정을 안고
아침마다 일어나던 힘도 없다.
남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수고는 빠진 채
눈에 잘 띄는 결과들만 남는다.
그런 성적표로 내 인생을 채점하면
성실하게 살아온 날들도
자꾸 낙제가 된다.

옛집 마당의 감나무를 떠올려본다.
한 가지에 달린 감도
한날한시에 붉어지지는 않았다.
먼저 익은 감을 보며
아직 푸른 감을 실패했다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두었다.
물론 사람의 삶은 감나무와 달라서
기다리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지는 않는다.
끝내 이루지 못하는 바람도 있다.
그래도 이루지 못한 것 하나가
살아낸 모든 시간을 지워버리게 두지는 말자.
친구의 좋은 소식을 듣고
마음이 잠깐 작아졌다면,
못난 사람이라고 혼내기 전에 물어보면 좋겠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아쉬웠을까.”
그 질문 끝에는 남을 이기고 싶은 마음보다
나도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가만히 앉아 있을지 모른다.
친구에게 건넨 축하가 진심이었듯,
오늘 나에게 건네는 위로도
진심이어도 된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남의 좋은 소식이 들려온 날에도
내 삶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희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