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은 버렸는데, 나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현관에는 아직
출근할 때 신던 구두가 있다.
몇십 년 동안
아침마다 내 발을 기다리던 구두.
급한 날에는 뒤축을 구겨 신고,
비 오는 날에는 신문지를 넣어 말렸다.
이제 매일 신지 않아도 되는데
아침이 되면 눈길이 간다.
몸은 쉬어도 된다고 하는데,
마음은 자꾸 묻는다.
“오늘은 어디에 가야 하지?”
누군가 내 이름보다
직함을 더 자주 불러주던 시절이 있었다.
전화가 오면 할 일이 생겼고,
부탁을 받으면 내 자리가 확인됐다.
바쁠 때는 그렇게 쉬고 싶었는데
막상 전화가 뜸해지면
휴대폰 소리를 괜히 확인하게 된다.
소리가 꺼져 있는 것도 아닌데
한 번 더 화면을 켠다.
서운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런 일로 서운해하는 내가
조금 작아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맡았던 일을 내려놓으면
손뿐 아니라 마음에도
빈자리가 생길 수 있으니까.
문제는 그 빈자리를 보면서
내가 전부 비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명함에 적힌 몇 글자가
나를 다 설명했던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이 좋아하는 빵을 사던 사람.
후배가 실수했을 때
밥부터 먹자고 말하던 사람.
피곤한 날에도
약속한 일을 마무리하던 사람.
명함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지만
그런 모습 역시 나였다.
그 시간들은
퇴직 서류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그 마음과 경험을 어디에 쓸지
내가 천천히 찾아보면 된다.
누군가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대신
내가 궁금한 곳의 문을
한 번 두드려볼 수도 있다.
서점에 들러 책을 고르고,
배우고 싶던 수업을 알아보고,
오랜 친구에게 먼저 안부를 물으면서.
첫날부터 새로운 역할을
찾아내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것도 해내지 않은 하루에도
따뜻한 밥을 먹고
햇볕을 쬘 자격은 충분하다.
우리는 너무 오래
쓸모를 증명해야만
편히 쉬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현관에서
조금 편한 신발을 골라보자.
출근하는 길이 아니어도
나갈 수 있는 길은 있다.
직함 없이 내 이름만 가지고
걸어도 되는 길.
그 길에서 만날 나를
너무 초라하게 짐작하지 말자.
아직 함께 살아볼 날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단희쌤 드림